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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제 5 호 이태준의 수연산방에서

  • 작성일 202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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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혁

정기자 임지혁 201710846@sangmyung.kr




  성북에 가면 수연산방이라는 곳이 있다. 학교에서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지만 직접 이어진 대중교통편이 없으니 자차 또는 택시를 이용하거나, 어렵다면 시간이 넉넉한 휴일이나 방학 때 방문하기를 권한다. 


  서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서 버스로 환승하면 닿을 수 있는 곳이라서 이전에 소개했던 길상사와도 가는 길이 비슷한 편이다. 하지만 수연산방과 길상사는 언덕의 골목길에서 걸어서 서로 15분의 거리에 위치하므로 역전에서 버스를 탈 때에 어떤 버스를 탈 것인지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1111번 버스를 탄다면 수연산방으로, 성북02번을 타면 길상사로 향한다. 하지만 설령 버스를 잘못 탔다고 하더라도 너무 낙담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두 곳 모두 멋진 장소이므로 어느 쪽으로 향하던 그 기억은 따스하게 남을 것이다. 다만 작년에 길상사에 대해서는 얕게나마 다룬 바 있으므로 이번에는 더 언급하지 않겠고, 오늘은 새롭게 수연산방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학부의 마지막, 졸업을 준비하는 시기에 있는 기자가 한량한량 찻집이나 노다니는 것이 합당하느냐 의문이 있을 수 있겠지마는 우리 자하 교지는 세상의 만사를 다루는 곳이다. 그런 교지의 생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날 좋은 때에 펜 한 자루 들고서는 세상 오만 곳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9월의 첫날에 찾아간 수연산방은 일종의 전통 찻집이며 풍경이 좋은 한옥 양식의 건물에 앉아서 대추차 등 전통차를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풍경이 좋고 차가 맛나다고,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그곳에 간 것은 아니다. 근처에 많이 있는 왕돈까스 집에서 식사를 하려고만 갔던 것도 아니다. 이곳 수연산방은 상허 이태준 선생께서 1933년~1946년까지 기거하시며 작품을 집필하시던 유서 깊은 곳이다.


  코로나 이후 건강이 좋지 않은 이유로 우선 병원에 들르고선 곧바로 성북동으로 향했다. 1111번 버스에 앉아서 가만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아뿔싸, 영업시간을 확인하지 못했다. 매주 월, 화요일에는 쉬고 11시 30분에 문을 열어 평일에는 18시, 주말에는 23시에 문을 닫는다. 오늘은 금요일이므로 18시까지 하지만 지금은 이미 17시로 마지막으로 주문할 수 있는 시간이 지난 참이었다. 결국 다음번에 다시 오는 것으로, 그 후기만큼은 교지의 인스타그램에 클립 뉴스로나마 게시할 수 있도록 하자고 다짐하면서 근처의 저녁거리 맛집을 찾아서 나섰다.


  실은 선생께서 직접 당신의 자택에 찻집을 여신 것은 아니다. 찻집은 1999년 선생의 외종손녀가 당호를 내놓고 영업을 시작한 것이고, 원래의 당주였던 선생께서는 북으로 가셨다. 1946년의 일이다. 그 후로 반공을 내세운 과거 정부들이 월북했던 선생의 존재와 작품들을 금기시하다가 1988년에야 선생의 작품들이 공식적으로 해금되며 ‘상허학회’ 등에 의해 연구와 출판이 진행된다. 



  이태준 선생을 알게된 것은 어느 글 하나 때문이었다. ‘만년필’이라는 단편 수필, 이전에도 구인회(九人會), KAPF(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1]와 같은 근대 문학에 대한 얕은 지식으로 당신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글을 읽는 것은 처음이었다.



물질, 한낱 조그만 한 물형에 일종의 애정을 폭로함은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실임엔 감출 필요야 없는 것이다. 나는 만년필을 퍽 사랑한다. (...) 나는 다른 방면엔 박하더라도 만년필에만은 제법 흥청거렸다.

만년필(1934)


  학등(學燈) 5월호에 게시된 글의 내용은 조선에서 굉장히 희귀했을 미국 보스턴제 ‘무아’ 만년필을 잃어버린 일을 담고 있다.[2] 요즘에는 쓰는 사람이 많이 없다지만 필자는 그 즈음에 홍대 일대에서 만년필을 한 자루를 잃어버린 적이 있기에 그 굉장히 안타까운 심정을 공감하면서 글을 읽어나갔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도 짧은 글 안에서도 돋보이는 유쾌하면서도 읽기 쉬운 특유의 문체와 이야기가 마음에 닿았으므로 이태준 선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곧이어서 찾아가기 시작한다. 마지막에 이야기하겠지만 그다지 많은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얕은 지식으로나마 필자가 소개하고 싶은 선생의 책은 ‘문장강화’다. 1946년에 수연산방에 계시던 적에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글쓰기에 대한 전반적이면서 실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실용적이면서도 굉장히 잘 읽힌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글쓰기 책을 비롯한 실용 서적은 그 효용을 중시하는 이유로 굉장히 딱딱한 내용으로 구성하거나, 아니면 그 딱딱함을 조금 완화하고자 약간의 별개의 일화를 곁들이는 식으로 책을 쓰는 경우가 많지만 문장강화에서는 철저하게 글쓰기만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과 문체가 어우러지면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글쓰기 교재가 아니라 소설 한 권을 읽고 있는 듯한 감상이 들게 된다. 여기에 정지용 등, 당대에 이태준과 친밀하거나 유명한 작가들의 글에 대한 비평 아닌 비평까지 곁들어지면서 근대문학에 대한 지식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읽기에 더더욱 재미있어진다. 필자가 자하의 편집장으로 있던 시절에는 당당히 신입 기자 교육 자료로서 선정하였는데 부디 누군가 한 번쯤은 읽었으면 싶은 바람이 있다.



  이태준 선생은 철원 출신이다. 철원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일제시대에는 경원선 철도 교통의 중심지였던 까닭에 강원도에서도 손꼽히게 큰 도시였다고 전해진다. 한국전쟁 시기에 남북 모두 철원의 지리적 중요성을 알았으므로 그곳에서 사투를 벌였고, 결국 철원은 휴전선의 한가운데에 놓이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지, 선생의 생가는 휴전선 이남에 있기에 우리는 지금도 그 흔적을 향해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이태준 선생의 일생을 온전히 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철원에 있는, 생가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판 하나와 2024년에야 완공될 문학관, 서울 성북의 수연산방 정도만이 한반도에 남은 당신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비록 책은 잘 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 이름에 김유정 선생의 이름을 붙이고, 특히 박경리 선생은 삶의 족적을 따라서 문학관을 세울 정도로 문학에 우호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는 굉장히 초라한 대접이다.


  남과 북은 문학적인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선생을 버렸다. 그 흔적마저 지웠다.


  남은 선생의 눈에 차지 않았던 것 같다. 1946년 선생께서는 평양 조소문학협회의 초청으로 서울에서 출발해 소련을 여행하면서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 아르메니아 등지를 방문하였고 그 소감을 정리한 ‘소련기행’을 발표한다. 설령 그 글들을 읽지 않았더라도 위의 행적을 듣는다면 선생이 무엇을 보았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2차대전 최대의 공방전이 있었던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 그 참상 속에서 무사했던 수도 모스크바, 그리고서 펼쳐진 공업지대. 이러한 풍경이 조선의 한 문학가를 공산주의에 경도시켰던 것 같다. 혹자는 그 글을 두고 “과도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균형감각을 상실했다고도 이야기한다. 당대 소련공산당 내에서도 반발이 컸던 당시 스탈린 체계의 모순에 대한 통찰이나 지적이 전혀 없다는 점도 지적된다. 어쨌든 그 글을 통하여서, 선생의 시각으로 볼 적에 그 당시의 상황, 그러니까 남조선로동당이 붕괴되고 1948년에 들어서야 북한보다 2년 뒤늦게 토지개혁을 실시한 남한의 정치적 상황이 선생의 눈에 차지 않았다는 것은 추측해 볼 수 있겠다. 이후 서울로 돌아오지 않은 선생은 전쟁이 끝나고서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문학사에서 사라진다. 그나마 1988년에 선생의 이야기들을 해금시켰고, 지금에 이르러서야 고향 자락에 문학관을 하나 짓고 있다는 것이 위안거리일 것이다.


  북은 더욱 악랄했다고 평가해야만 하겠다. KAPF나 소련문학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이 강조되어 자유롭게 글을 쓰지 못한다는 문학계 내적인 상황도 있었으나 그보다도 외적인 영향이 압도적으로 컸다. 김일성을 필두로 한 빨치산파(혹은 만주파)는 남조선로동당계의 남로당파, 고려인계의 소련파, 중국공산당계의 연안파를 숙청하며 초기 북한의 집단지도체계를 붕괴시켰고,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북한은 온전히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 체계로 나아가게 된다. 북조선예술문학예술총연맹에서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던, 그리고 빨치산파와는 거리가 있었던 선생도 그 시기에 숙청되어 동쪽의 어느 오지로 가게 되었고 정권은 선생의 존재와 행적을 지웠다. 지금까지도 북한 정권은 선생을 복권하지 않았으므로 말년의 행적은 온전히 문학계 탈북자들이 전해준 입소문뿐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구인회 일원이자 친구였던 정지용이 충고한 바와 같이 조국의 서울로 돌아왔으면 좋았을까. 마냥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인회 구성원의 상당수는 월북하였고, 서울에 남은 정지용은 그 유명한 보도연맹에 가입한다. 그 시절의 많은 사람이 새로운 민국에서 더 나은 것을 꿈꾸었지만 두 권력자는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것들을 지웠고, 그렇게 사람들의 생각들과 그로 인한 선택지의 결말은 온전히 개인의 파멸로서 남게 되었다. 남과 북의 대립은 겉으로나마 사상대립이었지만 실상은 그보다 못한, 수준 이하의 고집과 욕심, 그리고 포용이나 공감의 부재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아마 지금도 진행 와중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선생께서 도심의 한가로운 곳에서 찻집을 운영하시는 세상을 상상한다. 한국의 문학계에는 ‘69’ 다방으로 유명한 이상의 다방 경영 수난사가 유명하지만 그래도 그것보다는 번창하지 않았을까. 선생의 글을 읽을 때면 어딘가 슬픈 기분이 들면서 작품의 유쾌함과는 달리 선생의 이야기가 슬프게 마무리되는 것에 대하여 굉장히 안타깝다. 만년필을 잃어버리는 때의 그 슬픔, 그보다도 한 시대에 대한 절대적인 유감. 이렇게 잡다하게 떠도는 생각들이 선생의 책을 많이 읽지도 못하고, 그저 한량한량 오늘처럼 그 자취를 떠돌고만 있는 이유라고 변명한다.




[1] 에스페란토어로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국사편찬위원회 등 일부 자료에서는 Federatio로 표현되는 경우가 있으나 본문에서는 사전적으로 옳은 Federacio로 표기하였습니다.

[2] 무어(Moore)는 1899년에 설립된 미국의 만년필 회사로서 당시에 양질의 필기구를 생산하던 유명한 기업이다






[ 참고 문헌 ]

1. 권성우. (2005). 이태준 기행문 연구. 상허학보, 14, 187-222.

2. 장영우. (2009). 그들의 문학과 생애 - 이태준. 한길사.

3. 이태준. (2003). 이태준 - 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04. 돌베개.

4. 윤홍로. (2023-08-31 접속).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5. 신동욱. (2023-08-31 접속). 이태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