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을 만나다 (4)분청사기덤벙문대접
- 작성자 학예사
- 작성일 2019-02-11
- 조회수 5506
상명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분청사기덤벙문대접은 조선시대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분청덤벙문대접은 백토르 탄 물에 그룻 굽다리를 잡고 거꾸로 덤벙 담갔다가 꺼냄으로써 표면이 백토분장된 분청사기로 국이나 숭늉 등을 담을 때 쓰는 식기모양으로 만든 것이 분청사기대접이다.
분청사기는 고려 말 청자로부터 변모 발전한 것인데 분청사기란 용어는 1930년대 고유섭이 당시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미시마(三鳥)”란 용어에 반대하여 새롭게 지은 “분장회청사기(분紛粧灰靑沙器)”의 약칭이다. 제작 시기는 고려 말부터 조선조 16세기 중엽까지 제작되었다. 고려 말 정치경제사회가 혼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청자제작기술자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소규모 도기제작을 하였는데 이것이 분청사기 제작의 시초였다. 퇴락한 상감청자(象嵌靑瓷)에 그 연원을 두는 이 사기는 14세기 후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조선왕조의 기반이 닦이는 세종연간(1419-1450)을 전후하여 그릇의 질(質)이나 형태 및 무늬의 종류, 무늬를 넣는 기법 등이 크게 발전되어 절정을 이루게 되었으며, 조선 도자공예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이게 된다. 그러자 백자의 생산이 계속 증가되었으며,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분청사기의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백자만이 남아 조선시대 도자기의 주류가 되었다.
특히 분청사기덤벙문대접은 일본인들이 차(茶)도구로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에서 발전하였다. 분청덤벙은 제작할 때 굽다리를 손으로 잡고 거꾸로 담그기 때문에 굽 언저리에 흰흙이 묻지 않으며, 백토가 뭉쳐 흘러내린 자국은 추상적인 우연의 효과를 보여준다. 박물관이 소장한 분청사기덤벙문대접의 추상적인 표현은 조선시대 도공들의 예술적인 모습과 자유로운 미의식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