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을 만나다 (2)청화백자모란문합
- 작성자 학예사
- 작성일 2019-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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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화백자모란문합은 조선시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청화백자모란문합은 찜, 떡이나 밥 그 밖의 음식을 담는 용기이다.
청화백자는 왕실에서나 사대부 집안에서 주로 쓰였기 때문에 기형과 문양이 고풍스럽고 무늬가 없는 순백자와는 다른 미의식을 보여준다. 청화백자모란문합은 세련된 기형을 가지고 있으며 고급스런 모란문이 시문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상품경제의 발달과 국경 무역 등으로 중인들이 부를 축적하게 됨에 따라 자기 수요가 확대되었다. 18세기부터 중국의 문물에 대한 동경이 심화되어 청자기의 장식기법을 모방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져 중국풍의 자기가 많이 제작되었다.
원래 청화백자는 14세기 전반 무렵 중국의 경덕진(景德鎭) 가마(강서성 부량현 흥서현)에서 개발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고급 백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5세기부터 중국의 영향으로 청화백자가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청화백자 제작 초기에는 중국이 이슬람에서 수입한 청화안료를 재수입하여 사용하였고 나중에 중국이 자체 개발한 청화안료를 수입하여 사용하였다. 중국 청화안료를 수입함으로서 청화안료의 가격이 안정됨에 따라 백자 위에 청화(靑畵)장식이 많아졌다.
청화백자모란문합은 백토면 위에 청화안료(청화안료는 광물의 상태의 안료를 한 번 구운 후 잘게 부수고 보조제와 섞어 만들어지며 붓으로 자기 위에 그릴 때 오동기름을 섞어 사용되었음)로 문양을 붓으로 그린 다음에 유약을 씌우고 1300도 온도에서 구워내었다.
모란문합은 동체와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뚜껑의 상단부는 평평하며 상단부 위에 도안화된 ‘수(壽)’자문이 시문되어 있다. 동체는 구연에서 하단부를 향해 곧게 내려오다가 하단부에서 곡선을 그리면서 크게 줄어들어 굽에 이른다. 뚜껑과 합신(盒身)에 다른 모양의 모란절지문을 옆으로 전개시켰다.
모란문합에서 모란문은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데 모란문은 중국 당대(唐代)이래로 길상과 행복, 번영의 상징으로 즐겨 쓰여 왔다. 우리나라의 공예품에 모란문이 시문되어 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